효종의 대구와 영조의 협수
1789년, 활과 화살을 갖추고 융복(戎服)을 입은 대소 관료들이 창덕궁 춘당대로 모여들었다. 정조가 여러 신하들을 후원에 초대한 까닭은 연사례(燕射禮)를 열기 위해서였다. 연사례는 임금과 신하가 한자리에 모여서 잔치를 베풀고 술 마시며 활을 쏘는 특별한 예식이다. 정조의 활쏘기 실력은 무예가 뛰어난 무관들도 감탄할 정도로 탁월했다. 정조는 평소 문신들에게는 활쏘기를, 무신들에게는 독서를 권장하여 신하들이 문무겸전(文武兼全)하기를 바랐다. 문무를 두루 갖춘 정조의 말에는 누구도 거역하기 힘든 권위가 실려있었다. 연사례에서 50발을 쏘아 4발도 과녁에 적중시키지 못했던 다산 정약용은 정조의 엄명으로 후원에 갇혀 지내며 며칠 동안 내리 활을 쏘아 실력을 갖추었던 일이 있다.
북소리와 징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북소리가 들리면 과녁을 맞힌 것이고, 징소리가 들리면 맞히지 못한 것인데, 맞힌 자는 동쪽에 서고, 못 맞힌 자는 서쪽에 섰다. 정조는 과녁을 맞힌 자에게 활과 살을 내려주고, 맞히지 못한 자에게는 벌주를 내리며 신하들과 즐겁게 어울렸다. 연사례를 마친 후 정조는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가 입은 복식은 모두 선왕들께서 입으셨던 옛 의복들이다. 대구(帶鉤)는 효묘(孝廟)께서 쓰셨던 것이고, 자립(紫笠)은 현묘(顯廟)께서 쓰셨던 것이고, 금대(錦帶)는 숙묘(肅廟)께서 쓰셨던 것이고, 협수(夾袖)는 선조(先朝:영조)께서 쓰셨던 물건이다.”
사도세자의 패도
정조가 입은 융복에 얽힌 사연이 참으로 특별하다. 활과 검을 매다는 혁대의 두 끝을 끼워서 맞추는 자물단추인 대구는 임금의 현조(玄祖:5대조)인 효종의 손때가 묻은 것이고, 붉은색 갓은 고조부 현종이 쓰던 것이고, 허리를 둘러맨 비단 허리띠는 증조부 숙종이 매던 것이며, 소매가 좁아 동달이라 불리는 협수는 조부이자 선왕인 영조가 입었던 옷이라는 사실을 신하들이 비로소 알게 된다. 군신이 어울리는 연사례에서 선왕들의 유품을 사용하여 왕조의 정신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음을 신하들에게 보여주는 정조의 계산된 행동과 말이 사뭇 흥미롭다. 그런데 이어지는 정조의 발언은 신하들의 귀를 의심케 하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지금 내가 차고 있는 이 패도(佩刀)도 아버님 경모궁(景慕宮)께서 일찍이 착용하셨던 장신구이다. 본래의 체취가 아직 가시지 않았으며 쓰시던 손때가 그대로 남아 있으니, 집안에서 전해지는 보물이 어찌 적도(赤刀)나 천구(天球)뿐이겠는가. 내가 가끔 이것들을 착용하는 것은 추모의 마음을 담으려는 것이다.”
정조의 이 말은 신하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사도세자가 사용한 패도는 사연과 논란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세간에 은밀하게 떠돌았던 소문은 물론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도 사도세자가 검을 휘둘러 사람을 여럿 죽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니 사도세자의 패도(佩刀)는 모두가 꺼리는 흉물이었다. 사도세자의 칼은 효종의 대구나 영조의 협수와 어울릴 유물이 아니었다. 궁금하지 않은가. 정조는 왜 자신이 존경하며 모범으로 삼았던 효종이나 영조의 검이 아니라 아버지 사도세자의 검을 선택했을까?
연사례를 열었던 이날의 특별한 사연은 1789년 당시 규장각 직제학으로 있던 김재찬이 기록한 것으로 『홍재전서』에 실려있다. 같은 책에 실린 정조의 말을 주목한다.
“임금의 말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는 모두 후세에서 보고 배우는 것이다. …나라에서 좌사(左史)와 우사(右史)를 설치한 것은 좌사로 하여금 행동을 기록하도록 하고 우사로 하여금 말을 기록하도록 한 것이니, 한마디 말, 한 가지 행동이라도 혹 빠뜨리는 것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나의 말과 행동을 보고 배우라
정조는 자신의 말과 행동이 역사책-『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일성록』에 낱낱이 기록되어 후대에 전해진다는 사실을 늘 의식하고 살았던 왕이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검을 찬 정조의 행동과 말에는 평소와 달리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의지가 가득하다. 정조는 세상에서 은밀하게 떠도는 아버지에 관한 흉측한 소문들은 사실이 아니라 모두 거짓이라고 항변하고 싶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추측을 하는 까닭이 있다.
첫째, 연사례를 열었던 바로 그해(1789년) 가을, 정조는 아버지의 무덤을 천하제일의 명당으로 알려진 수원 화산 현륭원에 모신다. 둘째, 같은 해 정조는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와 박제가, 장용영 장관 백동수에게 『무예도보통지』 편찬을 지시한다. 정조는 『무예도보통지』 머리말에서 임진왜란 때 무예 6기를 정리한 한교의 『무예제보』를 계승하여 사도세자가 무예 18기를 도보로 정리한 『무예신보』를 펴낸 사실을 강조한다. 아울러 『무예신보』에 마상기예 6기를 더하여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는 목적을 무예의 표준화와 장수와 무사들에게 무예를 널리 보급하기 위함이라 밝혔다. 주목할 것은 사도세자가 『무예신보』를 펴낸 1759년은 세상을 떠나기 불과 3년 전이라는 사실이다. 정조는 아버지의 일대기를 정리한 『현륭원지(顯隆園志)』에서 사도세자가 창덕궁 후원에서 말을 달리며 활을 쏘고, 효종이 제작하여 사용했던 청룡언월도와 철주를 들고 무예를 수련했던 사실을 『궁중기문』이라는 책을 인용하여 상세하게 소개한다. 정조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은, 아버지는 효종 대왕의 북벌을 계승하려는 원대한 꿈을 가진 건강한 정신과 육체를 가진 훌륭한 왕세자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휴대하던 검을 중요한 행사 때 착용하여 자신도 효종의 북벌 의지를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더군다나 사도세자가 잠든 현륭원은 본래 효종이 묻힐 뻔했던 곳이 아닌가. 정조에게 아버지의 칼은 효종의 북벌 의지를 드러내는 자주 조선의 상징이었다.
글쓴이 : 김영호
「무예도보통지」 등
■ 공저
「조선후기 군사개혁과 장용영」
「수원을 아시나요」
「수원의 르네상스를 이끈 사람들」
「조선의 무예서와 도검」 등